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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상식

양심 없는 웃음에 대하여

by freewind 인문 2022.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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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 없는 웃음에 대하여

 

아트앤스터디         지식메일         2013-06-20 ()

 

 

 

악마의 표정

 

 

매년 여름이 되면 극장가를 장식하는 공포영화.

많은 사람들이 뜨거우면서도 눅눅한 여름 더위를 잠시라도 잊기 위해 공포영화를 찾는다.

소스라치게 놀라고, 때로는 괴로워하면서도 공포영화를 즐기는 아이러니한 우리 인간의 모습이다.

공포라는 장르는 그 근원을 추적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된 역사를 가졌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로부터 민담으로 구전되어,

오늘날까지도 짜릿한 즐거움을 주는 이야기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 바로 귀신이야기이며 괴담이다.

그런데 그 무서운 귀신이나 악마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 가지 묘한 특성을 찾을 수 있다.

많은 작품 속에서, 악마는 험상궂은 표정을 짓고 협박을 하기보다,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 것으로 표현된다.

처녀 귀신의 깔깔 웃는 목소리는 온 산을 울리기도 하고, 귀신들린 자는 가톨릭 신부를 비웃으며,

흡혈귀들은 어둠 속에서 순진한 먹잇감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 있다.

 

 

왜 웃음인가

 

왜 이야기꾼들은 그들의 웃음을 표현했을까.

이 질문 자체가 답이 포함된 어리석은 물음이다.

그들이 웃고 있는 게 실제로 더 소름 끼치기 때문이다.

많은 이야기의 순진한 주인공들은 복잡한 체스 판 앞에서 영문도 모른 채 몰락하는 하수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가장 믿었던 이웃이 천천히 주인공을 몰락하게 만들거나, 싫더라도 피할 수 없는 적이 주인공의 삶을 장악하고 있다.

주인공이 엉겁결에 체스 판에 말을 놓았을 때, 마주 앉은 악마는 슬그머니 웃음 짓는 것이다.

서구문화권의 대표적인 공포 캐릭터라고 할 수 있는 흡혈귀는 특히 이러한 특성이 도드라진다.

브람 스토커(Bram Stoker)나 존 폴리도리(John Polidori)와 같은 작가의 고전적인 작품에서,

흡혈귀는 어김없이 겉으로는 교양있고, 유능하며, 심지어는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들이 본색을 드러낼 때면(아마도 그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다음 날),

처참한 시신이 발견되거나 갓난아기가 유괴된다.

 

 

 

우리는 여기서 어렴풋한 의문점을 가질 수 있다.

이야기 속의 악마들은 희한하게도, 인간과 비슷하다.

더 정확히는 '어떤 인간들'과 비슷하다.

매스컴에 보도된 사건들 중에도 이러한 사례들은 분명히 있다.

몇 개월씩 계획해서 누군가를 속이고, 마침내 그의 소중한 것(생명, 장기 등)을 빼앗는 일들 말이다.

공포소설의 작가들은 어쩌면, 그런 '인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악마, 흡혈귀'와 같은 단어를 내세워서 그들이 인간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닐까.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

 

오늘날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와 같은 단어는 널리 알려져 있다.

둘은 '반 사회적 인격장애'라는 더 큰 범주에 속하는데, 사이코패스의 개념은 유명한 살인사건을 통해서 알려졌고,

그에 덩달아 소시오패스의 개념도 알려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두 유형은 차이점도 많지만, 공통점도 있다.

국내에 발간된 몇몇 심리학 저서의 일관된 내용을 요약하면,

타인과의 감정 공유 능력이 결여되어 있거나, 우리가 '양심'이라고 부를 만한 어떤 것이 그들에게는 없으리라는 것이다.

좀 더 차갑게 말하자면, 그들의 뇌에는 양심을 느끼거나 작동시키는 뭔가가 없거나 손상되었으리라는 것이다.

'양심'이라는 개념은 의학용어도 아니며, 명확히 정의되는 단어라고도 보기 어렵다.

그러나 심리학자 마사 스타우트는 바로 양심 개념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곧 윤리에 관한 이야기라는 말이다.

여기서 악마, 흡혈귀에 대한 이야기가 매우 인간적인 이야기라는 것을 다시 떠올릴 수 있다.

악마는 언제나 인간이 세워놓은 '윤리적 규율'을 심각하게 어기는 존재로 나타난다.

그들이 정녕 신적인 존재(또는 초월적 존재)라면, 왜 하필 '인간의 룰'을 어기는 것으로 묘사되는가?

오히려 고전적인 공포소설들은 그런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어떤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양심의 역할 그리고 인간의 약점

 

'양심'의 정의가 어떻게 되든 간에, 우리는 그것이 최후의 경찰관과 같은 역할이라는 것에는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보는 사람이 없거나,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는 범죄라 하더라도,

스스로 선을 넘지 않으려는 것, 혹은 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그러한 마음 말이다.

정말 감쪽같은 거짓말을 해서 누군가를 속이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못내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거나,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만드는 거추장스러운 마음. 그것이 우리를 비효율적으로 만들 수는 있지만,

더 나은 인간, 더 나은 가치를 향해 있으리라는 것은 막연하게나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상인의 양심이 약해지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몇 가지 있는데, 가장 상식적인 것은 개인이 위기에 처했을 때.

더 설명할 것도 없이 위기에 처했을 때 사람은 거짓말도 하고, 타인에게 비겁한 수를 쓰기도 한다.

또 다른 경우는 강한 명령을 받았을 때. 거역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진 사람이 부조리한 명령을 내릴 때,

어쩔 수 없이 비양심적인 일을 수행하거나, '내 탓이 아니다'라고 느낄 수 있다.

언급한 두 가지는 모두 '벗어날 방법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해도 될까.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양심을 포기할 수 있는 상황,

그것은 익명 속에 파묻혀서 개인이 소멸되었을 때.

 

 

개인이 사라진 순간

 

 

홀로 한적한 거리를 걷고 있는데, 눈앞에서 갑자기 응급환자가 발생한다고 가정해보자.

구체적으로 어떤 노인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고 생각해보자.

인근 병원으로 그 사람을 들쳐 업고 뛰어간다거나, 경찰에 신고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행동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더 정확히는 한적한 거리에 갑자기 쓰러진 노인을 그대로 두는 것 자체를 어려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상황을 조금 바꿔서 그 거리에 행인이 200명쯤 있다고 가정해보자.

목격자도 많고 도울 사람도 많으니, 그 노인이 도움을 받을 확률이 더 높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목격자가 많을 때 오히려 누군가가 그 노인을 들쳐 업거나,

119에 신고를 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는 속도가 느려진다고 한다.

이럴 때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면, '119에 신고해주세요'라고 허공에 외칠 것이 아니라

군중 속의 특정인을 손가락으로 지목하면서 '당신이 119에 신고하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빠르다고 한다.

우리는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확실한 것은, 수백 명이 보는 앞에서 누군가가 쓰러졌을 때, 그가 도움을 받지 못한다 해도,

'오직 나만의 잘못'이 아닌 것은 맞다.

또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환자를 돕기가 부끄러워서 망설여질 수도 있다.

이런 여러 가지 변수가 나의 행동을 방해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냉혹히 말해, 군중 속의 개인은 아무것도 아닌 이유에 의해

비양심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사는 곳 - 인터넷

 

또 하나의 끔찍한 상황을 가정해보자.

어떤 사람이 도로를 건너다 과속 질주하던 차량에 치였다고 생각해 보라.

사방으로 피를 튀기면서 그 사람이 허공에 떠올랐다고 상상해보자.

그 사람이 몇 미터를 날아가서는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져서 신음하는 장면을 눈앞에 그려보라.

이를 지켜본 많은 행인들은 대부분 충격을 경험하면서, 쓰러진 사람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군중 속에서 어느 젊은이가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

 

 

"방금 날아간 그 사람 양학선 같았어. 완전 멋있잖아. 그거 기술 '' 아니야?"

그렇게 두어 명의 젊은이들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선 안 되겠지만, 억지로라도 상상해 보자.

아마 이런 상황에서 낄낄 웃을 수 있다면,

앞서 언급한 반사회적 인격장애자이거나, 공포소설의 악마 같은 존재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상황을 조금 바꿔서, 어느 인터넷 뉴스기사에 사망사고 소식이 올라왔고,

그 아래에 비슷한 댓글이 달리는 것은 어떤가.

그것은 훨씬 있음직한 일이 된다.

타인의 비극과 위험을 웃음거리로 여기는 것이 인터넷에서는 훨씬 쉽다는 것, 우리는 이미 알고 있고, 인정해야 한다.

그런 댓글 놀이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은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가장 큰 군중이 모이는 곳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 군중은 양적으로 수천에서 수백만 명이 운집한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거기서 우리는 영어 몇 자로 된 닉네임으로 활동한다.

군중 속의 개인이 비양심적으로 변할 수 있다면, 인터넷 상의 인간은 어떠한가.

만일 인터넷상의 어느 게시물이나 농담 섞인 댓글이 경악할 정도로 끔찍하다면,

그것은 아마도 거기서 작성자의 '웃음'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그 웃음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

1800년대 공포소설에서 웃고 있는 악마나 흡혈귀가 현대의학에서 말하는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를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면, 양심이 희석된 네티즌의 웃음은 어떤 의미인가.

 

 

참고문헌

 

- 존 폴리도리, 뱀파이어, 1819

- 조셉 세리든 레퍼뉴, 카르밀라, 1872

- 마사 스타우트, 당신 옆의 소시오패스, 산눈, 2008

- 로버트 D 헤어, 진단명 사이코패스, 바다출판사, 2005

 

 

- written by Joe (braincase@artnstud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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