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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상식

조조가 애타게 찾은 비운의 여인, 채문희

by freewind 인문 2022.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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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가 애타게 찾은 비운의 여인, 채문희

 

아트앤스터디         지식메일          2013-05-23 ()

 

 

 

삼국지의 조조만큼 간신과 영웅 사이를 오가며 극단적 평가를 받는 역사적 인물도 드물다.

조조가 시대의 영웅이라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도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조조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간신, 탐욕스러움, 교활함 등이 대부분이었다.

세기의 충신이자 용맹함의 상징이며 수호신으로 추앙 받는 관우와는 사뭇 대조적인 모습이다.

조조는 삼국지를 다룬 연극이나 영화, 소설 등 에서 늘 간신의 전형으로 표현됐고

하얀 분칠을 한 채 악인으로 등장하였다.

수 많은 역사서와 작품에서 조조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범람하는 것은

유비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촉한정통론'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조를 희대의 간신이 아닌 영웅으로 바라보는 시각과

그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들이 속속 나타났다.

중국의 정치가이자 희곡작가였던 곽말약은 조조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주로 역사극을 쓴 희곡작가이기도 했던 곽말약은

자신의 희곡 채문희가 조조를 위한 작품임을 서문에서 확연히 밝혔다.

 

-곽말약, 채문희-

 

 

"특히 삼국연의와 공연 예술에서 묘사된 조조는 간신의 전형이 되어 하얀 얼굴을 한 나쁜 놈으로 등장하였다.

그래서 세 살배기 아이까지도 조조를 미워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변했다.

조조에 대해 우리는 이제 공평한 평가를 해야만 한다. 나는 조조의 공적을 인정한다.

그는 한나라 말기의 붕괴된 사회를 안정시켰고 황하 유역의 생산 질서를 회복시키고 발전시켰으며

집을 잃고 떠돌아다니던 백성들이 정착하여 일을 하며 살 수 있게 해주었다."

 

곽말약의 조조 편애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희곡 채문희. 그렇다면 채문희는 과연 누구일까?

어떤 역사적인 인물이었길래 조조를 재평가하기 위해서 그녀가 필요했던 것일까.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

 

채문희는 후한의 중신 채옹의 딸로 이름은 염이며 자가 문희다.

채옹은 대학자로 명성이 높았으며 당대 최고의 서예가이기도 했다.

또한 음률에도 뛰어난 인재였다.

당시 후한의 집권자였던 동탁은 채옹의 재능을 매우 아끼고 신임해 그를 중용했다.

하지만 폭정을 휘두르던 동탁은 원소가 맹주였던 제후들의 관동연합군에게 살해당한다.

채옹은 동탁이 죽음을 당한 뒤에 그의 시체 앞에 엎드려 울다가 하옥되었고

결국 감옥에서 6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아버지의 재능을 그대로 물려받은 채문희 역시 글과 음률 등의 재주가 뛰어났다.

그녀는 열 여섯의 나이에 첫 번째 결혼을 하지만 남편과 사별한 뒤 친정에 머물던 중 아버지 채옹의 죽음을 듣게 된다.

 

 

채문희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 후 그녀는 흉노가 침입했을 때 포로로 북으로 끌려간다.

12년의 세월이 흐른 뒤 천하를 호령하게 된 조조는 절친했던 친구의 딸인 채문희를 찾는다.

고향과 등진 채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길 오매불망 바랬던 채문희는

조조가 내민 구원의 손길이 고맙기 그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갈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없었다.

흉노에서 좌현왕의 아내가 된 채문희에게는 두 아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끝내 두 아이들과 이별하고 12년 만에 중원으로 돌아온다.

조조가 채문희를 어렵게 찾은 것은 친구인 채옹에 대한 순수한 우정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채옹이 생전에 소장했던 책의 필사본을 총명한 채문희를 통해 얻으려는 목적도 있었던 것이다.

 

 

남편의 목숨을 구한 재능

 

중원으로 돌아온 채문희는 조조의 주선으로 흉노에 자신을 데리러 왔던 동사와 세 번째 결혼을 한다.

하지만 첫 남편과 사별하고 아버지를 감옥에서 잃은 것도 모자라 두 아이들과 생이별하게 만든 비운의 운명은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세 번째 남편인 동사마저 큰 죄를 짓고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채문희는 운명에 굴하지 않고 조조에게 선처를 호소하며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명공의 마구간에는 말이 만 필이 있고,범 같은 용사가 숲을 이룰 만큼 많습니다.

어찌 발 빠른 말 한 필은 아깝게 여기면서 죽을 목숨은 구하지 않으십니까?"

 

그녀는 뛰어난 언변으로 조조를 감동시켜 남편을 구해낸다.

채문희가 남편을 구한 일화는 그녀가 왜 탁문군, 반소와 함께 중국의 4대 재녀로 꼽히는지 보여준다.

 

 

애절한 모정

 

채문희의 뛰어난 재능은 그녀의 대표작인<비분시(悲憤詩)>와 에서도 엿볼 수 있다.

<비분시(悲憤詩)>와 은 흉노에 포로로 끌려가던 비통함과 분노, 그들에게 당한 능욕과 굴욕,

오랑캐 땅에서의 애환과 고통,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귀향과 자식과의 이별 등을 읊고 있다.

그 중에서도 오랜 고생 끝에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자식과 이별해야 하는 마음을 노래한 구절은

읽는 이의 심금을 절로 울린다.

 

 

 

남은 생애,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도 못 했지만,

 

오랑캐의 아이를 안은 채 눈물이 흘러 저고리를 적시네.

 

한나라 사신 나를 맞으러 와 수레는 떠나려 하는데,

 

아이 목이 쉬도록 울부짖어도 누가 알아주리오.

 

나와 생사를 함께하려 했는데 이러한 일을 당하니,

 

자식 걱정에 해도 빛을 잃는구나!

 

어찌하면 날개 돋아 너희와 함께 돌아갈 수 있으랴.

 

한 걸음 뗄 때마다 또 한 걸음 멀어져 발길 떼기 어려운데,

 

그 모습 사라져 넋은 빠져도 사랑만 남았구나!

 

열세 번째 가락은 곡조 급하고 구슬픈데,

 

애간장이 무너져도 내 마음 아는 이 없네.

 

 

채문희의 기구한 삶과 일생은 희곡 채문희를 쓴 곽말약 뿐만 아니라 후대의 문학과 미술작가들에 큰 영감을 주었다.

대표적인 미술 작품으로는 <문희귀한도><문희별자도>가 있다.

<문희귀한도>는 채문희가 흉노에서 귀향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고

<문희별자도>'문희가 아들과 이별하다'라는 뜻을 지닌 그림이다.

뛰어난 재능에도 난세의 시류에 휩쓸려 비운의 삶을 살았던 채문희. 조조뿐만 아니라

후대의 사람들까지 애타게 그녀를 찾는 까닭은 그녀의 뛰어난 재능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네 삶만큼 기구한 운명 때문일까.

 

 

- Written by uwindow (uwindow@artnstud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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