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아트앤스터디 지식메일 2012. 10. 04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늘 치열하게 무언가를 하고 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하늘을 보는 여유를 갖자'라는 말을 상기하며 잠시 푸르른 하늘을 보며
그 찬연한 색에 감탄하지만, 그저 그뿐이다.
시선을 다시 아래로 거두면 그저 치열하게 치열할 수밖에 없는 세속적 일상이 우리를 기다린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마저 일상의 회전속도에 빨려 들어가 흔적도 없어지는 상황을 마주할 때
우리는 일상에 대해 패배감을 느낀다.
하지만 때로 일상의 회전에 강한 브레이크를 걸고 끝내 고요한 순간을 만드는 어떠한 힘이 도래할 때가 있다.
그 순간은 다름 아닌 '죽음'이란 단어가 떠올랐을 때다.
죽을 뻔한 위기를 겪었다거나, 주변의 누군가 죽었다거나, 느슨하지만 어느 유명인의 죽음소식을 들었을 때,
일상은 잠시 뒷전으로 물러나고 우리는 하늘을 쳐다보듯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죽음을 떠올렸을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두 부류다.
공포, 슬픔, 고통 등의 부정적인 감정 그리고 편안함, 안식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이다.
죽음은 곧 '끝'이라는 이데올로기 앞에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죽음을 규정하고 죽음의 씨앗을 삶 안에 심어놓을 수 있을까?
생명과 죽음
프랑스의 해부학자 비샤(1771~1802)는 "죽음은 생명의 마지막이며 질병의 끝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병리적 과정의 끝에는 늘 죽음이 위치해있다.
가령 우리는 암 환자를 1기, 2기, 3기로 나누며, 이 숫자가 높아질수록 죽음에 가까워진다고 판단한다.
죽음은 생명과 질병의 과정을 거친 필연적인 종착역이다.
이 종착역 앞에서 우리는 열심히 운동을 하고, 올바른 식습관을 정립하고, 노화를 방지하기 위해 다양한 상품을 소비한다.
모두 죽음을 유예하기 위한 행동들이다. 어떤 의미에서 삶은 죽음으로부터의 '저항'이다.
죽음은 생명에 비해 좀 더 자명한 사실이다.
아직 사람의 형체를 갖추지 못한 태아라든지 그저 호흡만 하고 있을 뿐인 식물인간을 어떻게 볼 것인지
사회적 논란은 종식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생명의 기준이 아직 최종합의에 이르기에는 모호한 점을 많이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 비해 죽음은 그 기준이 명확하다.
우리는 호흡이 멈춘 것만으로도 한 사람의 죽음을 쉽게 인지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나와 타인을 구분하는 기준 역시도 생명보다는 죽음에 가깝다.
분할할 수 없는 최소단위, 즉 나누면 죽는 것을 우리는 개체(individual)라고 한다.
관계란 개체들의 연결을 말한다.
이렇듯 여러 측면에서 죽음은 생명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우리가 삶 속에서 강하게 삶을 느끼기보다 죽음을 상기함으로써 강하게 삶을 느끼는 것처럼
죽음은 복잡한 생명보다 삶을 더욱 자명하게 만들어주는 척도가 될 수 있다.
여기 두 사상가가 죽음을 고찰함으로써 삶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였는지 소개한다.
하이데거의 '죽음'
하이데거의 문제의식은 '존재'와 '존재자'를 구별하는 것이었다.
'존재'란 '존재자'로 하여금 존재하게 하는 근거이다.
존재자를 존재하게끔 만든 것이 신이라면 신 역시도 존재자일 뿐 존재가 아니다.
하이데거는 존재자를 또 다른 존재자로 소급하는 것을 '나쁜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존재자로 환원할 수 없는 존재란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존재는 '현 존재'(인간)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을 '존재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특권적 존재'로 보았으며,
형이상학을 곧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파악했다.
한편 하이데거는 존재의 문제를 해석할 수 있는 지평을 '시간'으로 보았다.
그에게 있어 시간은 흘러가는 어떤 것이 아니다.
시간이란 '죽음으로 미리 달려가 보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미래가 '도래'하는 것이 시간인 것이다.
하지만 '현 존재'는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미완의 존재'이며, '비 존재'이고 '유예된 존재'이다.
하지만 이것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아직-아님은 단순한 미완이 아니라 가능성을 향해 열려있는 상태를 말한다.
현 존재에게 자유란 '죽음을 향한 자유'다.
하이데거는 '선택'을 '앞에 놓여있는 품목 가운데서 임의로 어떤 것을 골라내는 행위'라고 보지 않았다.
그것은 비본래적 존재의 행위로 시간의 목줄에 끌려가는 인간의 형상일 뿐이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선택이란 그야말로 '목숨을 거는 것'이었다.
현 존재는 '죽음'이라는 자유 안에서 존재 가능성을 늘 가까이 느끼는 능동적인 존재인 것이다.
보르헤스의 '죽음'
보르헤스가 바라보는 죽음은 하이데거와는 반대로 '죽음'을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죽음의 의식만 버린다면 모두 불사의 삶을 살 수 있다"고 했다.
불사의 존재란 끊임없이 죽는 존재이다.
끊임없이 죽는다는 것은 문턱을 넘는다는 것이고 문턱을 넘는다는 것은 다른 종류의 삶을 계속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한탄한다.
"인간만이 죽음을 인식해서 불사가 아닌 존재이다"라고. 또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죽을 것이다. 그래서 만인이 될 것이다.”
‘보르헤스의 죽음’은 비장했던 ‘하이데거의 죽음’에 비하면 한없이 가벼운 것이었다.
* 참고강의 : 이진경 <생명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 Written by nilnilist (nilnilist@artnstud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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