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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상식

상갓집 개에서 인류의 스승까지

by freewind 인문 2023.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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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갓집 개에서 인류의 스승까지

 

아트앤스터디       지식메일       2013-05-02 ()

 

 

 

"동문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이마는 요()임금을 닮았고, 목은 고요(皐陶)와 비슷하며, 어깨는 자산(子産)과 비슷하다.

그러나 허리 아래는 우()임금에 3치 못 미친다.

몹시 지친 것이 마치 상갓집 개와 같다." 자공(子貢)이 이 사실을 공자에게 알렸다.

공자는 기뻐하여 웃으며 말했다.

"외모는 꼭 그렇지 않지만 '상갓집 개'라고 말한 것은 맞는구나, 정말 맞는구나."

 

공자, 그는 누구인가. 아니,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공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논어는 동양 최고의 고전이며, 그는 인류의 스승이자 성인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전근대사회를 규정하는 남성우월주의의 보수주의자라는 것.

공산주의 사상과 근대성에 대한 추구로 한때 공자는 중국 내에서 지워야 할 구태로 여겨졌으며,

문화대혁명 시기에 거의 모든 유물과 유적들이 파손되는, 아픈 시기를 거쳐야 하기도 했다.

 

공자는 이름은 구(), 자는 중니(仲尼)로 기원전 551년에 노()나라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약관의 나이에 어머니 또한 잃었다.

친가로부터 정식 자식으로 인정을 받지 못해 장성한 뒤에야 아버지의 묘소를 알게 되었으며,

일찍부터 잡일을 전전해야 했다.

그가 활동했던 당시는 춘추전국시대로서, 하극상이 만연하고 도덕이 땅에 떨어진 시대였다.

공자 말씀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 하였듯이

그는 선왕의 도가 땅에 떨어진 시대에 출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대의 정치가, 교육자, 사상가로서 천하에 이름을 알렸으며, 만년에는 그의 제자가 3천 명에 이르렀다.

그의 학맥에서 맹자로 이어지는 정통유학이, 순자를 거쳐 한비자로 이어지는 법가 사상이 나왔으니,

제자백가의 큰 흐름의 원류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렇게 막대한 영향력을,

25백여 년이 흐른 지금의 우리에게까지 끼치고 있는 공자의 힘은 어디에 기인하는 것일까?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자신의 능하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 한가.

논어의 너무나도 유명한 첫 구절이며, 이 또한 책의 첫머리에 등장한 게 우연은 아닐 것이다.

공자는 당대 지식인의 전범으로서 예악(禮樂)에 능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호학(好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치가로서의 공자의 삶은 순탄하지만은 못하였다.

아니, 너무나 험난하여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중년의 나이에 노나라를 떠나 14년간 천하를 주유하며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펼칠 군주를 찾아다녔으나,

부국강병에 눈이 먼 그들에게 공자의 주장은 그저 '공자님 말씀'에 불과했다.

그는 상갓집 개와 같다는 소리를 듣고, 세상을 등진 현자들로부터 조롱을 받고,

엉뚱한 인물로 오해를 받아 생명의 위협을 받기까지 했다.

그러던 중 다시 고국 노나라의 부름을 받고 정착하니, 그의 나이 이미 68세였다.

그로부터 73세에 별세하기까지, 생의 마지막을 교육자로서, 저술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한다.

그는 때에 맞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는 인물로서 나아감과 물러남을 알았고,

결국 그 이상의 현실정치로서의 실현은, 당대에는 이뤄지지 못하였다.

하지만 "덕이 있는 자는 외롭지 않아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그의 말씀처럼,

그는 비록 한탄하였을지언정 좌절하지 않았다.

 

 

 

이후 공자의 유가(儒家)는 한()나라 시대에 이르러 전격적으로 수용되었으며,

현재까지 동양문화를 지배하는 거대한 전통이 되었다.

여전히 공자의 사상은 우리 곁에서 유효하며, 어떻게 반응하든 우리는 공자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중국은 오늘날 공자를 문화영웅으로 치켜세우고 있다. 이렇듯 공자의 존재는 영원성을 갖고 있다.

 

 

호학(好學)

 

공자가 불멸성을 얻게 된 것은 그의 교육자로서의 업적 덕이라고 할 수 있다.

논어는 공자의 제자들이 저술하였으며, 대부분이 공자와 제자들 간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과유불급이라고, 그는 거침없는 제자에게는 물러서게 했으며 움츠린 제자에게는 나아가게 하였다.

군자의 덕을 가르치며 인()으로 예()에 맞게 행할 것을 강조했다.

 

"세 사람이 길을 감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으니,

그중에 선한 자를 가려서 따르고, 선하지 못한 자를 가려서 잘못을 고쳐야 한다"는 말씀처럼,

삶의 매 순간 자신을 돌아보고 배우는 자세로 임하도록 당부하였다.

훗날 공자가 회상하기를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하였고, 서른 살에 자립하였고, 마흔 살에 사리에 의혹하지 않았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고, 예순 살에 귀로 들으면 그대로 이해되었고,

일흔 살에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넘치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는 과연 어느 지점에 서 있는 것일는지? 나이만 먹은 건 아닐는지?

 

공자에 대한 호오(好惡)가 갈린다고 하여도,

다른 한 편에서 공자가 비록 수많은 오해와 편견 속에 이해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침에 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공자의 말씀을 새겨본다면

그의 호학(好學)하는 자세는 그 누구에게든 귀감이 될 만하지 않겠는가?

지금 당장은 무용할지라도 고전은 주변과 후세에 전해주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공자의 말씀을 담은 논어는 바로 그러한 책이다.

 

 

- Written by bldalmle(bldalmle@artnstud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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